침팬지도 비웃을 '은마아파트 경고문'
[게릴라칼럼]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를 허하라
12.08.13 14:23 | 최종 업데이트 12.08.13 16:44 | 강인규(foucault)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 저자는 자연의 본능으로부터 인간이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 F. De Waal

인간은 공감의 존재다. 공상과학소설가인 필립 딕은 "공감 없는 사람은 실수로 만들어진 로봇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empathy)'을 이렇게 정의한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것."

대단히 심오한 능력인 것 같지만, 사실은 침팬지 같은 유인원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다.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 공감의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남의 고통은 아랑곳 없이 제 욕심만 채우려 들 것이고, 서로 싸우다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300년 후면 소멸하게 될 한국인들처럼 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한국이 현 출산율을 지속하면 300년 후에 인구 감소로 소멸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살 수 있다면 애초부터 무리를 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상대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이런 '사회적 본능'에서 도덕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무리를 짓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것은 고귀한 이타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남고 남들 속에서 평온하게 지내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

드 발은 침팬지조차 배려와 협력의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지난 해 말 테드 강연에서 100년 가까이 된 낡은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우리에 갇힌 침팬지 두 마리가 밧줄을 하나찍 쥐고 열심히 당기는 장면이 담겨 있다. 동아줄은 우리 밖에 놓인 과일상자 양모서리에 연결돼 있는데, 꽤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혼자서는 끌어 당길 수 없다. 침팬지는 힘을 합쳐 줄을 모두 당긴 후 즐겁게 음식을 먹는다
.

더 흥미로운 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배가 부른 경우다. 배고픈 놈이 힘껏 줄을 당겨 보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는 배부른 동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함께 밧줄을 당긴다. 배부른 놈이 가끔씩 한눈을 팔긴 하지만, 결국 끝까지 힘을 보태 준다. 하지만 상자가 코 앞에 도착했어도 배부른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주린 놈이 과일을 독차지한다
.

신기하지 않은가? 배부른 침팬지가 왜 도움을 베풀까? 어차피 자신은 노동의 결실을 얻지 못할 텐데. 간단하다. 자신도 언젠가 배가 고파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자신도 동료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

배달부는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


사람은 어떨까? 여전히 집단생활을 하지만, 협력과 배려의 본능은 잃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파트 주민들이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 금지령을 내릴 수 있을까? 제 입에 음식을 날라주고, 제 집 앞에 신문을 놓아주는 사람에게 말이다.

 침팬지 등 유인원도 '사회적 본능'에 따라 배려하고 협력할 줄 안다. 한 세기 전에 촬영된 기록사진으로, 침팬지가 힘을 합해 먹이를 당기는 장면이다. 왼 쪽의 침팬지는 배가 불러 음식이 필요치 않지만, 동료를 위해 끝까지 줄을 당겨 준다.

ⓒ TED


최근 서울 은마아파트 각 동 입구마다 '배달사원의 승강기 이용을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배달원들은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 배달"해야 하며 "개선되지 않을 시 이에 상응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승강기 고장과 전력 낭비, 입주민들이 승강기 사용에 불편을 겪기 때문에 제한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승강기 유지비와 전기료가 아까워서라는데, 배달원들이 아파트에 놀러가기라도 하는가. 주민들을 위해서 배달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당신이 코고는 사이에 신문이 문 앞에 놓일 수 있고, 당신이 눈꼽도 떼지 않는 채 그 맛있는 음식을 거실에서 받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승강기 고장이 우려되고 전기료 낭비가 가슴 아프다면 정말 '놀러가는 사람'인 방문객부터 사용을 금해야 옳다
.

은마아파트측의 항변은 이렇다. "배달원들이 엘리베이터를 쓰기 때문에 새벽에 교회에 가거나 출근하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것이다. '불편'을 호소했다는 걸로 보아, 14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승강기를 짜증스레 기다리기보다 걸어 내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배달원들에게 승강기를 타지 말라고 한다. 무거운 음식 박스와 신문더미를 든 채 아파트를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은마아파트 49층 재개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더 기가 막힌 건 "새벽에 교회에 가는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이야기였다. 새벽기도에 참석할 만큼 신실한 교인들은 교회에 앉아 무슨 기도를 하고 무슨 은혜를 받았을까. 예수라면 엘리베이터를 배달원에게 내 주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셨을 것이다. "네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공감의 원칙은 예수가 말씀하신 이 황금률에도 들어 있다
.

예수는 물론, 침팬지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침팬지는 공감의 능력을 발휘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은마아파트만이 아니다. 다른 아파트에서도 비슷한 경고문이 발견된 적이 있으며, 여러 지역의 입주민들이 승강기에 탄 배달원들에게 눈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원들은 교통사고의 위험 속에서 음식을 나른다. 피자 배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강인규


우리가 침팬지 수준은 된다고 주장하려면,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배달을 시키지 말거나, 배달원들의 승강기 사용에 투덜거리지 말거나. 하지만 우리 모습은 어떤가. 승강기도 못 쓰게 하면서 버젓이 고층 아파트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는 늦게 왔다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한국사회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앞서 '침팬지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본능적 이타심마저 지워 버린 한국사회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우리도 한 때는 침팬지 못지 않은 박애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기억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도 어려서는 옆의 아기가 울 때 같이 울어주는 연대의식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우리의 공감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근처의 낯선 사람이 하품하면 따라서 하품을 하지 않는가. 우스개가 아니라, 과학자들은 이런 반응을 타인에 대한 공감 본능의 표출로 본다
.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갓난아기들이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공감하는 성향이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에 내재된 증거"라고 설명한다. 아기는 18개월에서 2년 반 사이에 남과 자신을 구분하게 되는데, 그 이후에도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이가 우는 아기를 안아주거나, 장난감을 갖다주며 달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리프킨은 이를 '공감의 확장'이라 부른다
.

코흘리개조차 남의 고통에 얼굴을 찡그릴 줄 아는데, 어떻게 우리는 남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로 자라났을까? 리프킨의 책이 답을 준다
.

"공감의식이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얼마나 발달하고, 넓어지고, 깊어지는가는 부모가 초기부터 아이를 어떻게 기르느냐에 달려 있다. 아울러 그 아이가 태어나 습득하게 되는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렇다. 부모와 사회가 멀쩡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불공감증' 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기는 커녕 그들의 고통을 이용해 제 잇속을 챙기는 존재로 말이다. 그게 정확히 한국사회가 몰락하고 있는 이유다. '남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본능적 이타심마저 지워 버린 채, 그 속에 '경쟁체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된 탐욕을 채워 넣은 덕분에 말이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진 않는 손'이라는 시장원리를 제안해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도덕감정론>의 첫 장 첫 문장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드 발은 자연이 '생존경쟁' 원리를 토대로 작동한다는 통념이 옳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낭설로 인간의 경쟁체제를 합리화하려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침팬지 무리 일부에게만 음식을 주어도, 20분 이내에 모든 구성원들이 음식을 갖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군집동물들에게는 나눔과 이타성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 F. De Waal


"인간을 아무리 이기적 존재로 가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내재된 원리가 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요소로 삼게 된다. 비록 다른 이의 행복을 지켜보는 기쁨 이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아담 스미스는 "경쟁체제만이 살 길"이라며 걸핏하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한국사회를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걸까? 인간의 본능과도 거리가 멀고, '자본주의 아버지'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먼 야만을 말이다.

'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거짓을 믿지 마라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모습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선거때 보자"며 벼르기도 한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야만의 모습은 집권당을 바꾸고 대통령을 갈아치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비인간적 탐욕이 비인간적이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를 고른 것 뿐이다
.

권력은 우리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차기 대선에서 더 유능하고 도덕적이고 교양 있는 지도자를 뽑는다고 해서, 아파트 주민들이 환하게 웃으며 배달원을 승강기로 안내하지는 않을 것이다
.

배달원들을 동정하라거나 억지로 친절을 베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생존이 당신의 생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행복이 곧 당신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뭐라고 배웠고 당신이 자식에게 뭐라고 가르치고 있든, 그게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30분 배달제'를 시행하던 피자 체인은 사고가 잇따르자 이 제도를 폐지했으나, 그 이후에도 '피자가 식으면 무료' 등의 판촉 행사를 열었다. 최근에는 패스트푸드 체인이 '주문 후 60초 이내에 나오는 햄버거' 행사를 열다가 항의를 받고 중단했다.

피자회사 광고 캡처


'
사회적 본능'을 되찾는 것만이 이 사회가 몰락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파업 중인 노동자가 있다면, '불편'을 이유로 파업 노동자를 서둘러 비난하지 마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왜 파업을 하는가는 알려고 노력하라. 당신의 삶이 절박해 질 때, 남들이 당신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면 말이다.

식당 종업원, 판매원, 배달원들에게 마땅한 감사와 존경심을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들의 사소한 실수를 눈감아 주고, 그들의 수고에 진정으로 감사하자. 당신을 돕는 사람들 아닌가. 고용주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하기보다, 그들을 칭찬하고 더 나은 처우를 당부하도록 하자
.

당신의 허기를 재빨리 채워주는 패스트푸드점 직원들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일해야 하고, 배달원은 당신 음식의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오토바이를 몰다가 온기 없는 시신으로 부모를 맞기도 한다. 그런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감사와 존경을 보이면, 그들도 당신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고 날라 줄 것이다. 살만한 세상이 별건가
.

당신 아파트에 '배달원 승강기 탑승 금지' 경고문이 보이면 떼어 버려라. 그런 곳에 몸 붙이고 산다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 리프킨 말대로, 당신 자녀가 그걸 보며 배울 것이다. 제발 인간답게는 아니더라도 동물답게는 살자.

※ 본 글은 오마이뉴스 기사 원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2013/02/19 22:21 2013/02/1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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